윤위의 보길도지

甫吉島識
보길도는 둘레가 60리로 영암군(오늘날 완도군)에 속하며, 수로로는 해남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보길도 북쪽에는 장자(獐子)?노아(鷺兒)등의 섬이 있고 그 외에도 십여개의 섬들이 여기저기 나열해 있다. 남쪽에는 제주(濟州)의 추자도(楸子島)가 있다. 이곳을 지나면 대양(大洋)이 되는데 수세(水勢)가 사납고 바람과 파도가 늘 일고 있다.
배는 정자 머리 황원포(黃原浦)에 댔다. 정자에서 황원포까지는 십리이며, 황원포에서 격자봉(格紫峰) 아래까지는 오리 남짓하다.
주산(主山)인 격자봉은 높이가 60-70길쯤 된다.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정북향(오좌자향(午坐子向)으로 혈전(穴田)이 있는데, 이곳이 낙서재(樂書齋)의 양택(陽宅)이다. 격자봉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뻗어내려 가는 도중에 낭음계(朗吟溪)?미전(薇田)?석애(石涯)가 있고, 서쪽에서 남쪽, 남쪽에서 동쪽을 향해  구불구불 돌아 안산(案山)이 되어 세 봉우리가 나란히 솟았으며 오른쪽 어깨가 다소 가파르다. 격자봉과의 거리는 오리이며, 높이와 크기는 격자봉에 미치지 못한다.
가운데 봉우리의 허리에는 석실(石室)이 있다. 동쪽 봉우리의 동쪽에는 승룡대(升龍臺)가 있으며, 동쪽 봉우리의 산발치가 외수구(外水口)가 되어 장재도(藏在島)의 오른쪽 기슭과 맞닿는다. 장재도는 남쪽에서 띠처럼 산줄기를 끌고오다가 둥근달처럼 생긴 섬으로, 양쪽 산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격자봉에서 오른쪽으로 떨어져 선회하면서 세 갈래로 나뉘어 빙돌아 북쪽으로 비스듬히 뻗어내려 가다가 낙서재의 동쪽을 평탄하게 감싸 돌며, 승룡대와 마주하고 둥근 모자처럼 우뚝 솟아 있다. 여기에는 훤칠하게 자란 소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는데, 이곳이 하한대(夏寒臺)이다.
대체로 석전(石田)은 낙서재의 왼쪽이 된다. 그리고 미전과 석에는 내청룡(內靑龍)이 되고, 하한대는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석전과 낙서재는 오리쯤 떨어져 있다. 미전과 석애는 그 중간에 있고 하한대는 두어 마장(數矢) 거리에 있다. 하한대의 높이는 주봉(主峰)에 비하면 삼분의 일 정도이며, 그 가지가 구불구불 돌아내려온 것은 또 하한대에 비하여 반쯤밖에 안된다.
하한대 아래는 곡수당(曲水堂)이고, 북쪽은 승룡대의 산기슭과 합하여 내수구(內水口)가 된다. 낭음계에서 흘러온 이 물은 북산(北山) 밑을 돌아 가운데에 연정(蓮亭)이 된다. 다시 하한대의 북쪽을 끼고 비스듬히 흐르다가 동쪽으로 나와 세연지가 되면서 황원포로 흘르가며 냇물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이 된다.
오른쪽으로 떨어진 산줄기가 셋으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하나는 하한대이고 가운데로 떨어진 것이 혁희대(赫羲臺)이다. 혁희대는 하한대와 동일한 모습이나, 하한대의 왼쪽 편편한 가지 위에 약간 솟아 있어, 마치 사람이 어깨를 포개 놓고 나란히 넘보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바깥 가지는 모서리를 이루며 동쪽으로 떨어져 옥소대(玉簫臺)가 되고, 그 그림자가 세연정 못 속에 거꾸로 비친다. 또 뻗어나와 외수구(外水口)가 되어 장재도의 왼쪽과 만난다. 오른쪽과 서로 만나는 곳은 수십 보 떨어져 있다. 바닷물이 장재도안으로 들어가는 곳으로서 원형으로 감싸고 돌고 물이 맑아 완연히 평평한 못을 이루고 있다. 장재도의 밖에 구불구불 옆으로 안고 돌아 바다 기운을 다 감추고 있는 곳은 노아도(鷺兒島)이다.
석전의 서쪽, 승룡대의 북쪽으로 겹겹이 감싸고 도는 산 가지가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낙서재에서는 보이는 것은 오직 미전, 석애, 석전의 안봉(案峰) 및 하한대와 혁희대가 상투처럼 반쯤 보일 뿐이다. 사방을 둘러보면 산이 빙 둘러싸여 있어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벌여 있는 것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도 같으니 부용동(芙蓉洞)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에서 연유된 것이다.
물은 낭음계에서 발원하여 세연지에 이르러서야 평활해졌는데, 맑디맑아 푸른빛을 띤다. 또 백옥 같은 암석은 짐승이 움츠리고 앉은 듯 사람의 형체인 듯하여 이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유람객들은 중흥(中興)의 돌, 삼청(三?)의 물도 이보다 더 아름답지 못하다고 찬미한다. 어떤 이는, ??동방의 명승지는 삼일포(三日浦)와 보길도가 최고인데, 그윽한 아취를 갖게 하는 곳은 삼일포가 보길도에 미치지 못한다??한다.
산이 무더운 구름과 장기(?氣)가 서린 바다 가운데에 있지만, 지기(志氣)와 청숙(淸淑)하여 한번 부용동에 들면 이 산 밖에 바다가 있는 줄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음침한 비구름이 한달 내내 덮고 있으나 주초(柱礎) 사이에는 습한 기운이 없고, 산속에는 사슴?돼지?노루?토끼는 있어도 범?표범?뱀?전갈에 상처 입을 걱정이 없다. 나무로는 소나무?가래나무?밤나무?산다(山茶)?유자나무?석류나무가 있어 온 산이 늘 푸르다. 그리고 죽순?고사리?버섯 등 산과 들에서 나는 진미와 태화(苔花)?전복?조개 등 맛은 철따라 다르지만 이른바 산해진수(山海珍羞)를 모두 갖추었다 하겠다.
거주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벼랑 위나 암석에 의지하여 사는 주민은 수십 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산새와 들짐승의 우짖는 소리가 들리고, 나무 그늘이나 풀 밑에서 자고 쉬며, 고사리도 따고 상수리와 밤을 줍기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돼지나 사슴들과 벗 삼는다.
이것도 보길도 경관의 대략이다.
세연정(洗然亭)
한 간에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 낙서재, 무민당, 및 세연저에는 모두 판호(板戶, 널판자로 만든 문)로 위 아래에 나무 지도리를 만들어서 문을 열면 위의 것은 처마에 걸리고 아래 것은 땅에 드리우게 된다. 또 닫으면 마주 합한 판옥(板屋)이 되어 바람과 비를 막아 준다.
헌(軒)의 높이는 한길이고 섬돌 높이 또한 한길쯤으로 못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물은 동쪽에서 구불구불 흘러내리다가 여러 개울물과 합쳐 이곳에 이르러서는 방지(方池)를 이루고 있다. 꽤 넓어서 동서는 6-7간이 되고 남북으로는 두 배가 된다. 굴곡된 지형을 따라서 잡석으로 축조를 했고, 혹은 암석을 의지하여 대를 만들기도 했으며, 흙을 쌓아 제방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듯 돌아가며 짧은 제방을 두르고 산다(山茶)와 영산홍을 심었다. 그래서 봄이면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고 푸른 이끼 또한 하나의 비단첩을 이룬다.
부용동에서부터 제방둑을 이르는 길 양쪽에는 장송(長松)이 울창하며, 제방둑에 이르면 다소 편편하게 널찍하다. 정자의 서쪽, 제방 동쪽에는 겨우 한 간 정도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그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가로로 다리를 놓아 누(樓)에 오른다. 이 다리가 비홍교(飛虹橋)이다. 비홍교 남쪽에는 혹약재연(或躍在淵) 등의 일곱 암석이 있어 정자 서쪽의 편액을 칠암헌(七岩軒)이라 하였다. <중앙은 洗然亭, 남쪽에는 樂書齋, 서쪽으로 同何閣, 동쪽에는 呼光樓라 했다. 편액은 고산연보 참조.> 암석은 모두 정결하고 말쑥하다. 더러는 제방을 지고 물을 마시고 더러는 흙을 깔아 소나무를 심기도 했다.
수원을 끼고 오르노라면 굽이굽이 보이는 경관들이 모두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장송은 수면을 스치고, 단풍나무와 삼나무는 암석을 가리고 있다. 또 두어 자 깊이의 물은 맑디맑아 푸른빛을 띠고 있다. 못 속의 암석들은 모두 둥글거나 모나며 깨끗하고 물이 맑아서 암석 위에 물이 넘쳐흐르는 것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못 남쪽 한가운데에 암석이 울멍줄멍 모여 조그마한 섬을 이루고 있는데, 그 위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북쪽에도 크기가 엇비슷한 암석들이 작은 섬을 구축했고, 동쪽의 좌우에는 각각 3층씩 방대(方臺)를 구축하였는데, 이를 동대(東臺)와 서대(西臺)라 한다.
남쪽 봉우리 위에는 옥소대(玉簫臺)라는 석대(石臺)가 있는데, 그림자가 못속에 거꾸로 비친다. 정자에 오르면 서쪽으로 미전과 석애를 볼 수 있고, 동으로는 장재도를 대하고 있으며, 전후좌우로는 푸른 산이 편편히 펼쳐져 있다.
또한 황원포는 완연히 평담(平潭)을 이루고 있으며, 앉으면 소나무 숲속에 가려져서 고깃배의 돛대만 장재도 사이로 은은히 보일 뿐이다. 하늘빛 바다빛이 천태만상으로 변하기 때문에 정자 동쪽에 조그마한 누를 지어 호광(呼光)이라 하고, 공(公)은 늘 난간을 의지한 채 멀리 바라보았다고 한다.
공은 늘 무민당에 거처하면서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경옥주(瓊玉酒)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자제들에게 각기 배운 글을 읽고 토론케 했다. 아침식사 뒤에는 사륜거(四輪車)에 풍악을 대동하고 곡수(曲水)에서 놀기도 하고 혹은 석실(石室)에 오르기도 했다.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곡수 뒷산 기슭을 거쳐 정성암(靜成庵)에서 쉬곤 했다. 학관(고산의 5남)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소거(小車)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수조(漁父水調)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했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했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긴 소매 차람으로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에서 낚시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도(東西島)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공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性情)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동천석실(洞天石室)
낙서재터를 잡던 처음에 안산(案山)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가 한참 뒤에 남녀(藍輿)를 타고 곧바로 석실로 향해가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기교하고 고괴(古怪)한 석문(石門), 석제(石梯), 석난(石欄), 석정(石井), 석천(石泉), 석교(石橋), 석담(石潭)들은 모두가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이며 그 모양에 따라 이름지어 졌다. 이곳 석함(石函)속에 한 간 집을 짓고 명명하기를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했다.
대체로 안산의 중간 봉우리 기슭에서 수십 보 올라가면 돌길이 구불구불 나있고, 산 허리에 이르면 갑자기 층계가 분명한 석제(石梯)가 있는데, 마치 사람이 축조한 것과 같다. 이 석제를 따라 올라가면 석문이 있다. 가운데는 오목하고 동이와도 같은 돌이 놓여 있으며, 겉은 깎은 듯하다. 공은 이곳을 몹시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수시로 찾아와 놀았다. 이곳에 앉으면 온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격자봉(格紫峰)과는 평면으로 마주하게 되며, 낙서재 건물이 환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대체로 사건이 있으면 무민당(無悶堂)과 기(旗)를 들어 서로 호응하기도 했다. 공은 때로는 암석을 더위잡고 산행하기도 했는데, 발걸음이 매우 경쾌하여 나이가 젊은 전각들도 따라가지 못했다 한다.
석실 오른쪽에는 석대(石臺)가 있다. 높이는 한 길 남짓하고, 넓이는 두어 사람이 앉을만 하다. 석대 밑에는 또 석문과 석제가 있고 석문 밖으로는 벼랑처럼 끊어진 매우 위험한 석폭(石瀑)이 있다. 등널쿨을 더위잡고 내려오면 맑게 흐르는 샘물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 주고 단풍나무 소나무 그늘이 덮여 있는 밑에는 검푸른 이끼가 돋아 있으며, 물이 떨어지면서 석담을 이루고 있다. 즉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함과 같다. 석담(石潭)가에는 석정(石井)이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는 장노(匠奴)가 죄를 저지르고 속죄하기 위해 이 우물을 팠다 한다. 한 간쯤 되는 석정에는 티없이 맑은 물이 넘쳐 흐른다. 그 밑에는 석교가 있으니, 곧 문집(文集)에서 말하는 희황교(羲皇橋)이다.
낙서재(樂書齋)와 무민당(無悶堂)
혈맥이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내려오면서 소은병(小隱屛)이 있고 소은병 아래가 낙서재 터가 되었는데, 그 혈전(穴田)은 꽤높고 크다. 왼쪽은 양(陽), 오른쪽은 음(陰)에 속한다. 입술은 다소 끝이 뾰족하고, 오른쪽에는 맑은 물이 감돌아 흐르고 있다.
충헌공<忠憲公, 고산 윤선도의 시호> 이 병자년(1636년)에 근왕병을 일으켜 물길로 이곳을 떠난 뒤 수일이 안 되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공은 생각하기를, 호남으로 급히 돌아가면 영남으로 통할 수 있을 것이고 조정의 명령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렇지 못하면 백이(伯夷)처럼 서산(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서산지미(西山之薇), 기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기자지금(箕子之琴), 관녕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관녕지탑(管寧之榻)것이 나의 뜻이라 하고 급히 영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하지맹(城下之盟,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에서 항복한 일)의 치욕이 있었다.
공은 충분(忠憤)에 복받치어 다시 육지에 오르지 않고 배를 띄워 남쪽을 향해 내려가서 탐라(耽羅)로 들어가려 하였다. 가는 길에 배를 보길도에 대고 수려한 봉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배에서 내려 격자봉에 올랐다. 그 영숙(靈淑)한 산기(山氣)와 기절한 수석을 보고 탄식하기를,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하고 그대로 살 곳으로 잡았다.
그러나 수목이 울창하여 산맥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게 하고 격자봉을 오르내리면서 그 고저와 향배(向背)를 헤아려 낙서재 터를 잡았다. 처음에는 초가를 짓고 살다가 그뒤에는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견고하게만 만들었을뿐 조각은 하지 않았다. <낙서재는 세 간으로 사방에 퇴를 달았으며, 간살이 매우 컸다.>또 낙서재의 남쪽에 외침(外?)을 짓고<한 간으로 사방에는 퇴를 달았으며, 간살이 매우 컸다.> 두 침소 사이에 동와(東窩)와 서와(西窩)를 지었다. (각기 한 간식인 데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 그리곤 늘 외침에 거처하면서 세상을 피해 산다(遯世)는 뜻으로 ??무민(無悶)??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공은 천성이 활달하였다. 건물을 비록 화려하지 않으나 간살은 모두 높고 크다. 방실(房室) 조정(藻井)을 갖췄다. 이 조정은 속명으로 반자이다.)
이곳에 앉아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절승한 모든 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옛날에는 뜨락 앞 섬돌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는데, 공이 세상을 떠난 뒤 학관(學官)이 옮겨다 파서 지금은 난간 아래 위치하게 되었다. 연못 좌우에는 화단을 쌓아 온갖 화초를 줄지어 심고, 그 사이사이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구며 놓았으며, 뜰 아래에는 화가(花架)가 있다. 섬돌은 모두 잡석을 사용하여 형상이 거북 무늬와도 같다. 또 천연석처럼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지금도 틈이 벌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남아 있다.
낙서재는 옛날에는 소은병 아래 있었다. 뒤가 낮고 앞이 높았던 것은 대체로 지형에 따랐던 것이다. 소은병이 바로 뒤 처마를 누르고 있고, 좌우 난간 가에는 괴석이 늘어서 있으며,뜰 앞 한가운데는 거북이 모양을 한 암석이 있어 이를 귀암(龜岩)이라 하였다. 이것이 곧 소은병의 여맥(餘脈)이다.
학관의 아들 이관(爾寬)이 내침(內寢)이 협소하다 하여 뜯어내고 다시 건축할 때, 뒤편을 편편하게 고르기 위해 모든 암석을 쪼아내 버리고 소나무를 베어 극히 사치스럽게 오량각(五梁閣)을 지었다. 그때 기초를 전보다 훨씬 낮추었고, 앞 기둥이 바로 귀암을 누르게 하였다. 현재 이 귀암도 반은 흙에 매몰되었고 난간 가에서 괴석을 찾아볼 수 없다.
일찍이 들은 말이다. 이관(爾寬)이 옛 터를 헐고 넓힐 때 일하던 사람의 꿈에 신선같은 백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귀암에 걸터앉아 탄식하기를, ??날아가는 용의 왼쪽 뿔을 깎아 버렸으니 장차 자손이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이관에게 고하니, 이관은 성을 내며, ??만일 영감(令監)이 꿈속에 내려왔다면 어찌 나에게 고하지 않고 너에게 고하겠느냐???하였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횡액(橫厄)을 만나 가산을 탕진하여 이 건물도 팔아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수통(水筒)은 옛날에는 후원에서 샘물을 끌어와 지붕 마루를 넘겨 뜰 가운데로 떨어지게 하고 커다란 구유통으로 받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서와(西窩) 뒤쪽으로 옮겨져 있다.>
곡수당(曲水堂)
하한대의 서쪽, 두 언덕의 중간 지점으로 경내가 아늑하고 소쇄하다. 공은 이곳을 사랑하여 수시로 왕래하였다.
원래 정자가 없던 곳인데, 학관이 조그마한 초당을 지어 휴식할 곳을 마련하자고 청했다. 공은 건물을 짓는 것을 싫어하여 학관에게 맡겼다. 학관은 드디어 사재를 내어 이를 지었다. <집은 한 간에 사방으로 퇴를 달았으며, 남쪽 난간에는 취적(取適), 서쪽은 익청(益淸)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이는 모두 학관의 글씨이다.>
정자는 세연정보다는 다소 작지만 섬돌과 주춧돌을 놓은 곳은 정교함을 더하였다. 초당 뒤에는 평대(平臺)를 만들고 대의 삼면으로 담장을 둘러 좌우에 작은 문을 두었으며, 그 중간에는 꽃과 과일나무를 심었다. 담의 서쪽 끝에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섬돌은 삼층으로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기에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다. 담밑에 흐르는 물은 낙서재 오른쪽 골짜기에 흘러 정자 십여 보 아래에 이르러서는 조그마한 곡수(曲水)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일삼교(日三橋)가 가설되어 있다. <학관은 항상 서재에 있었으나 공은 생존하여 당에 있었기에 이 다리를 거쳐 왕래하였다.>
일삼교에서 두어 걸음 돌아가면 유의교(有意橋)가 있고<언덕의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를 끼고 지었기 때문에 ??떨어지는 꽃이 뜻이 있는 것 같다??는 의미를 취하였다.> 이 밑에는 곡수가 되었다가 당 앞에 이르러서는 평지(平池)가 되었는데, 물이 반석 위에 퍼져 깊지도 넓지도 않다. 그 아래에 월하탄(月下灘)을 만들었다.
옛날에는 월하탄 가에 담을 에운 죽림이 있었는데, 초당 뒤편이 더욱 무성했다 한다. 지금은 남김없이 다 베어냈고 그 밑에 불차문(不差門)을 냈다.
연못 서쪽 언덕 위에는 두어 층의 돌을 쌓아 익청헌(益淸軒) 아래로 이어지는 무지개 다리를 가로질러 놓았다. 언던 위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동쪽에는 작은 대를 쌓았다. 대 위에 석정(石亭)을 축조하고 그 밑에는 반석을 깔았다. 돌을 포개 쌓아 기둥을 세워 들보를 걸치고 조각돌로 덮었는데, 대체로 단단하고 매우 옛스러웠다. 취적헌(取適軒)의 아래 유의교(有意橋)위에 연못을 파놓았는데, 넓이는 대와 비슷하고 깊이는 두어 간이며 석축한 것이 꽤 높았다.
후면에는 두어 층의 작은 계단을 만들어 꽃과 괴석을 벌여 심었으며, 동남쪽에도 방대(方臺)를 높이 축조하고, 대 위에는 암석을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어 놓았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하다. 다만 말쑥한 멋을 취했을 뿐 기교를 가미하지 않았고, 허리 부분에는 구멍 하나를 뚫어 그 가운데 석통(石筒)을 끼워 넣고 뒤에서 은통<隱筒, 숨은 흠통>으로 물을 끌어들여 구멍을 통하여 연못으로 쏟아지게 하고 이를 ??비래폭(飛來瀑)??이라 불렀다. 이 연못에 물이 차면 수통을 가산 뒤로 옮겨 작은 언덕 단부(短阜)에 대는데, 그 언덕에는 단풍나무?산다(山茶)나무?소나무들이 서 있다. <초당의 서남쪽 모퉁이 계단 위에는 백산다(白山茶) 한 그루가 있는데, 높이는 처마를 웃돌고 눈빛의 꽃이 연못에 비치고 있다. 산다는 곧 속명으로 동백이다.>
혁희대(赫羲臺)
혁희대는 하한대보다 조금 높은데, 안으로는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밖으로는 황원포(黃原浦)를 대하고 있다. 이는 격자봉 다음가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정북을 향해 멀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높은 곳에 올라 고향을 바라본다(陞皇倪舊)” 는 뜻을 취하여 명명하고, 궁궐을 연모하는 마음에서 붙인 것이다.
낭음계(朗吟溪)
격자봉 서쪽 세 번째 골짜기로 심원(深遠)하게 돌고돌았는데, 수석이 더욱 기절하다. 옛날에는 술잔을 흘려보내는 곡수(曲水)와 목욕반(沐浴盤)이 있었고, 송삼(松杉)이 울창하고 암벽(岩壁)이 깨끗하다. 공은 여가가 있을 때마다 죽장(竹杖)을 끌고 소요하고 영가(詠歌)하면서 돌아오곤 하였다 한다.
1748년 윤위가 짓고 이정섭(李廷燮)님의 국문번역을 편자가 약간 손질하여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