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답사기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의 여운
-보길도 답사기-
천병국
해남향토사연구회 고문
늦게 찾아온 장마가 그 위력이나 과시하려는 듯 게릴라성 폭우로 변하여 밤새 쏟아진다. 기상 예보에 의하면 내일 오전까지 100mm가 내릴 것이라니 아무래도 내일 보길도 답사기행은 우산의 신세를 져야겠구나 예단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깰 때마다 빗소리는 창문을 뚫고 귓전에 세차게 들려 왔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되자 빗소리가 차차 작아지더니 이윽고 빗방울도 걷히었다.
오늘 기행답사는 마고소양(麻姑搔痒)으로 여의하겠구나!������ 생각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10가족 25명이 땅끝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30분, 보길도행 철부선이 출항하기 10분 전이었다. 서둘러 승선을 했다.
보길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이다. 그 면적은 32.98㎢로 동서가 12㎞, 남북이 8㎞의 작은 섬이다. 해남 땅끝(土末)에서 12㎞, 군 소재지인 완도읍에서 32㎞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상 국립공원으로 3,70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자고로 동방의 승지는 삼일포(三日浦) 보길도(甫吉島)가 으뜸인데, 그윽하고 잔잔한 정취가 풍기는 보길도가 삼일포보다 낫다고 함과 같이 경관이 수승한데다가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가 많은 관광지이다.
배가 출항하자 소금기에 전 시원한 해풍이 배꼽까지 스민다. 일상에 찌든 때와 티끌이 일시에 날아가 버린다. 넓고 푸른 바다 위에 점점이 떠 흐르는 다도해가 바로 한가락 예술이요. 한 폭의 그림이다. 선상에는 삼삼오오 끼리끼리 모여서 어부사시사의 시(詩)와 경(景)과 흥(興)에 젖어드는데 극성스런 광주 아줌마들은 입도 즐거워야 한다며 인절미 하나씩을 돌린다.
철부선은 어지럽게 널려있는 미역, 다시마, 김 등의 발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중간 기항지 넙도를 거쳐 한시간만에 보길도 선착장 청별리에 닿았다. 일행 모두가 아침을 설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단은 회와 매운탕인데 그런대로 맛이 있다.
제 1답사지는 글씐바위다. 청별리에서 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 이 바위는 조선 숙종 2년(1639) 우암 송시열이 왕세자에 대한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 섬에 피신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의 억울한 심정을 글로 지어 바위에 새기게 했다는 것인데 300여 년의 비바람에 풍화 또는 마모되어 원형을 판독하기가 힘들다.
해안이 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루어지고 동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소안도의 맹선리 마을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우암 송시열이 배 안에서부터 배탈이 났었는데 너무나 위급하여 정적인 고산 윤선도에게 사람을 시켜 약방문을 청했다. 증세를 자세히 들은 고산은 돼지비게를 팍고아서 드리라고 했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배탈 난 사람에게 비계를 먹인다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저했는데, 우암이 우겨서 고아 먹고 바로 나았으니 아무리 정적이지만 사람의 목숨은 귀하게 여겼던 듯 싶다.
제 2 답사지는 예송리 해수욕장이다. 청별리에서 약 5km 떨어진 이 해수욕장은 천연기념물 338호인 감탕나무를 비롯하여 생달나무, 동백나무, 참느릅나무, 해송, 적송, 구실잣나무 등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 40호)과 갯돌밭으로 유명한데 10여 전에 왔을 때보다 해안이 문명의 찌꺼기로 오염돼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예송리에서 동남쪽으로 5km 쯤에 등대와 상록수림으로 유명한 자지도(항문도)가 있는데 어감이 점잖지 못하여 최근에 섬이름을 당사도로 개명(?)했다고 하니 지명이나 인명은 청각 인상이 제일 요건인 듯하다.
다음 코스는 청별리에서 약 5km 떨어진 부용동이다. 고산이 10여 년간 기거했던 낙서재(樂書齋)와 곡수당(曲水堂) 동천석실(洞天石室) 등이 있는데 낙서재와 곡수당은 터만 남아 있고 동천석실만 최근에 복원했다 한다. 동천석실은 낙서재에서 약 1km 떨어진 안산(높이100여m)의 팔부능선 쯤에 세운 정자다.
동천이란 산천의 경치가 두루 좋은 곳, 신선이 사는 곳, 하늘로 통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석실은 석조로 된 거실, 은거하는 방, 서책을 보관하는 곳이란 뜻이며 이 동천석실은 모든 사람의 금단의 지역이고 오직 젊은 소실 설씨만이 출입했다니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오나니스의 사랑의 외딴 섬 정도나 되었던 모양이다.
산의 경사가 45도쯤 되고 본 채인 낙서재와의 거리가 1km 쯤 되어 음식을 날라다 먹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천석실과 산아래 집까지 줄을 이어 놓고 도르래를 이용해서 공중 수송했다고 하니 노복들의 노고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고산은 시서는 물론이요, 역학, 풍류, 유불선, 산학, 기하, 의학, 풍수 등에 도통한 석학이다.
동천석실에서 바라보는 적자봉의 능선이나 산자락은 그대로 곱게 핀 연꽃의 가장자리이고 미산은 그대로 연꽃의 꽃술이다. 아무리 모난 인성(人性)의 소유자도 이곳에서 며칠만 머무르면 편안한 적자봉의 경관에 순치되어 원융한 인성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르거니와 이곳에서 고산은 도교의 신선사상을 유감없이 실천했을 것이니 고산의 풍수관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현대의 가이아 이론과 같다고나 할까…….
낙서재와 곡수당은 폐허로만 남아 있어 새삼 제행무상의 심정뿐이다. 다만 낙서재가 북향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은 충신연주지정의 단심이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코스인 세연정이다. 그야말로 어부사시사나 고산의 예술, 풍류의 산실이다.
우리나라 조경 유적이나 원림 문화의 전범이다. 개울에 굴뚝다리라는 보를 막은 세연지는 일년 중 물의 유입과 유출이 자동 조정된다고 하며 현존 정자(세연정)는 1992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고산은 거문고와 가야금을 퍽 애호했고 그 탄주에도 능했다. 자신을 벼슬길에서 쫓겨난 초나라의 굴원으로 생각하고 어부사시사 40수를 지었는데 이는 원래 가관현을 연주하면서 희녀(姬女)들로 하여금 어부사시사를 노래하게 하고, 선상에는 창을 전제로 한 창사였다. 채색의 옷을 입은 동남에게 춤을 추게 하였다니 세연정은 가무의 상설무대였다. 현가의 즐거움을 누리던 세연정은 전통적인 배따라기나 선유락의 노래와 춤을 한 맥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있다니 역사도 새로운 해석인 모양이다.
벌써 오후 다섯 시다.
해바라기씨처럼 꽁꽁 여기만 하던 7월의 태양이 그 위력을 조금씩 거둬들인다.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타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의 여운이 길게 꼬리를 잇는다.